[고영경의 아세안 에너지 워치] 비싼 전기가 만든 태양광 시장 - 필리핀 에너지 빈곤의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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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에서 전기요금이 가장 비싼 나라는 사실상 필리핀이다. 싱가포르의 전기요금이 더 높지만 구매력은 필리핀의 약 13배다. 필리핀 중위가구는 월소득의 약 12%를 전기요금으로 낸다. 소득 대비 체감 부담으로는 필리핀이 사실상 아시아 최고 수준이다.
여기에 호르무즈 봉쇄가 충격을 가했다. 필리핀은 원유의 98%를 중동에서 수입하고 발전용 LNG 의존도도 높다. 2026년 3월 24일 마르코스 대통령은 행정명령 제110호(Executive Order 110)로 에너지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전쟁 대응을 이유로 한 비상사태 선포는 세계 최초였다. 정부는 주4일 근무제와 공공건물 전력 절감, 에너지 보조금을 시행했고 석탄화력 발전을 확대하며 러시아산 원유 수입도 재개했다. 대부분의 조치는 이후 정상화됐지만 전기요금은 오히려 상승했다. 최대 배전회사 메랄코(Meralco)의 주택용 전기요금은 2026년 2월 kWh당 13.17페소(약 316원)에서 6월 14.48페소(약 348원)로 약 10% 올랐다.
태양광으로 몰린 수요
비싼 전기요금은 태양광의 경제성을 끌어올렸다. 글로벌 기후·에너지 싱크탱크 엠버(Ember)에 따르면 주택용 옥상태양광 투자회수기간은 2025년 5월 4.0년에서 2026년 5월 3.1년으로 단축됐다. 상업용은 3.0년에서 2.3년, 산업용은 3.9년에서 3.1년으로 줄었다. 전기요금은 오르고 패널 설치비는 약 10% 하락한 결과다. 자가발전으로 만든 1kWh는 14.48페소에 사지 않아도 되는 전기다.
사실 필리핀의 높은 전기요금은 이번 위기 이전부터 이어진 구조적 문제였다. 위기 이전에도 전기요금은 세계 평균의 128%, 아시아 평균의 253% 수준이었다. 2026년 3월 필리핀 에너지부 비교에서도 주택용은 동남아 1위, 상업용 2위, 산업용 3위를 기록했다. 반면 1인당 전력소비량은 ASEAN 평균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전기를 많이 써서 비싼 것이 아니라 비싸서 충분히 쓰지 못했던 것이다. 태양광은 이 구조를 우회하는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 됐다.
정책의 턴어라운드
필리핀은 그동안 재생에너지 확대를 공언해 왔지만 그리드 병목과 높은 자본비용에 막혀 실제 속도는 더뎠다. 이번 붐은 시장만의 결과가 아니다. 위기를 계기로 정부도 제도 개선에 속도를 냈다. 우선 설치 절차를 크게 단축했다. 2026년 초부터 넷미터링 연계심사 기간은 20영업일에서 10영업일로 줄었고, 배전회사가 기한 내 양방향 계량기를 설치하지 못하면 자동 승인된다. 전기허가 발급 기간도 3영업일로 단축됐다.
전력 거래도 확대했다. 2월부터는 여러 지점의 태양광 발전과 소비를 묶어 상계하는 멀티사이트·집합 넷미터링이 가능해졌고, 6월 개정된 소매경쟁·개방접속(RCOA) 제도에 따라 100kW 초과 전력수요자는 공급자를 직접 선택해 태양광 전력구매계약(PPA)을 체결할 수 있게 됐다.
계통 수용성도 개선하고 있다. 태양광이 늘수록 전력망 안정이 문제가 되는데, 에너지규제위원회(ERC)는 2026년 그리드 코드 개정을 추진하며 그리드 포밍(grid-forming) 인버터 기반 태양광-저장 복합설비와 독립형 에너지저장장치(ESS)의 기술기준을 마련하고 있다. 재생에너지의 계통 연계 확대를 위한 제도적 기반이다.
이러한 변화는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다. 100kW 이상 수요처의 재생에너지 직접조달(GEOP), 재생에너지 우선급전, 100kWp 초과 옥상태양광 프로그램, 재생에너지 의무할당(RPS) 등 기존 제도가 이미 축적돼 있었다. 중동 에너지 위기는 이 제도 스택의 실행 속도를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었다.
중국업체의 부상
수요와 정책은 모두 갖춰진 지금, 그렇다면 태양광 시장의 가장 큰 과실은 누가 가져갔을까. 현재까지의 답은 중국 기업들이다. 필리핀은 2026년 1~4월에만 태양광 패널 4,133MW를 수입해 이미 2024년 연간 수입량(3,130MW)을 넘어섰다. 그 결과 파키스탄을 제치고 중국 태양광 패널의 2위 수출시장이 됐다. 유럽 재수출 허브인 네덜란드를 제외하면 사실상 최대 시장이다.
패널만 들어온 것도 아니다. 2025년 10월부터 2026년 3월까지 중국산 태양광 셀 2억9200만 달러(약 6.6GW)가 수입됐다. 이전에는 거의 없던 규모다. 필리핀이 패널을 수입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현지 조립까지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경제자유구역에는 1GW급 조립공장들이 들어섰다. 그러나 조립은 제조가 아니다. 필리핀은 여전히 밸류체인의 하단 공정에 머물며 제한적인 부가가치만 확보하고 있다.
중국 기업의 진출 방식도 다층적이다. 중국에너지건설그룹(China Energy Engineering Group)은 세계 최대 태양광·저장 복합 프로젝트인 테라솔라(Terra Solar)의 EPC를 맡아 프로젝트를 건설하고, TCL중환(TCL Zhonghuan)은 현지 제조사 선파워필리핀(SunPower Philippines Manufacturing)을 인수해 공급망 자체를 확보했다. 하나는 프로젝트를 짓는 전략이고, 다른 하나는 산업을 소유하는 전략이다. 중국 9개 기업은 필리핀 재생에너지 분야에 총 137억6000만 달러 규모의 투자를 발표했지만 상당수는 아직 발표 단계다. 그럼에도 필리핀은 이미 중국 태양광 공급망의 핵심 수요시장으로 자리 잡았다. 로컬 콘텐츠 요건과 기술이전, 상류 공급망 육성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조립공장은 글로벌 공급망의 수출 전초기지에 머물 가능성이 크다.
중동의 에너지 위기는 두 가지 결과를 동시에 낳았다. 재생에너지 전환이 탄력을 받았고, 높은 전기요금에 눌려 있던 전력 수요도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이제 막 열린 이 시장은 필리핀의 산업 발전으로도 이어질 수 있을까. 그 기회를 가장 빠르게 선점하고 있는 것은 중국 기업들이다. 필리핀의 에너지 전환은 에너지 빈곤의 완화에 그칠 것인가, 아니면 산업 성장의 기회로 이어질 것인가. 그 갈림길에 지금 필리핀이 서 있다.
고영경 연세대학교 국제학대학원 연구교수 / 아시아비즈랩 연구소장
[글쓴이 소개]
연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지역학 석사를, 고려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재무 전공) 학위를 받았다. 10여 년간 말레이시아 현지 대학 및 연구기관에서 조교수와 선임연구원으로 근무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디지털통상연구센터 연구교수이자 아시아비즈랩 연구소장으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아세안 슈퍼앱 전쟁》, 《7UPs in Asia》 등이 있으며, 기업 스토리텔러 및 중앙일보 〈마켓 나우〉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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