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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경의 아세안 에너지 워치

[고영경의 아세안 에너지 워치] 필리핀 전력시장을 주무르는 큰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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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경
9시간 14분전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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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스 대통령의 전력시장 개혁 요구와 의회가 내놓은 ‘내 전기법(Sariling Kuryente)’이 필리핀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다. 워낙 비싼 전기요금으로 서민생활과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에너지규제위원회(ERC)가 대통령 요구에 화답했다. 부당 징수액 환급과 소형 태양광 규제 완화 등의 행정지침을 내놓은 데 이어, 시스템 손실 요금에 부과되는 12% 부가가치세(VAT) 면제도 추진하고 있다.


시스템 손실(System Loss)이란 발전돼 비용이 지불된 전력이 소비자에게 도달하기 전 송배전 과정에서 소실되는 전력이다. 이 비용의 일부는 소비자의 전기요금에 반영된다. 하지만 감면 효과는 크지 않다. ERC에 따르면 지난해 전체 시스템 손실 요금은 약 500억 페소(약 1조2000억원)였고, 여기에 붙은 VAT는 약 60억 페소(약 1400억원)였다. 월 전기요금이 1만 페소(약 23만원)인 가구도 시스템 손실 VAT를 없애 얻는 감면액은 100페소(약 2300원) 미만이다.


그런데 업계의 반응은 엇갈렸다. 아보이티스 그룹의 비사얀일렉트릭(Visayan Electric)은 마르코스 대통령의 요구를 지지한 반면, 전국 최대 배전회사 메랄코(Meralco)의 마누엘 팡길리난 회장은 업계가 "살아남지 못할 수 있다"고 했다. 왜 같은 개혁을 두고 반응이 다른가.


서로 다른 이해관계


가장 민감한 곳은 메랄코다. 전국 전력수요의 약 40%를 담당하고, MGen을 통해 발전, MPower를 통해 소매사업에도 참여한다. 배전사업이 핵심인 만큼 시스템 손실 요금 폐지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다. 메랄코는 손실을 줄이려면 배전망 투자가 필요하고, 비용 회수 장치가 사라지면 투자 여력도 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메랄코의 소유구조는 필리핀 정치사의 굴곡을 그대로 보여준다. 1961년 로페스(Lopez) 가문이 미국 자본으로부터 인수했지만 1972년 계엄령 이후 마르코스(현 대통령의 아버지) 정권에 넘어갔고, 1986년 민주화와 함께 다시 로페스 가문으로 돌아왔다. 이후 지분이 매각되면서 지금은 인도네시아 살림(Salim) 가문의 퍼스트퍼시픽(First Pacific)-팡길리난 연합과 고콩웨이(Gokongwei) 가문의 JG서밋(JG Summit)이 주요 주주다.


아보이티스는 발전설비의 약 24.3%를 차지하는 발전시장 1위 사업자다. 배전과 소매사업도 운영하지만 시스템 손실 요금의 영향은 메랄코보다 작다. 반면 발전시장 점유율은 법정 상한인 25%에 육박한다. 정작 이 그룹에 더 중요한 발전시장 집중이나 계열사 간 전력구매 제한은 이번 개혁 의제에 들어 있지 않다. 그룹 CEO 사빈 아보이티스(Sabin Aboitiz)는 마르코스 대통령 직속 민간부문자문위원회 위원장이고, 정부 출범 때의 첫 에너지장관도 입각 직전까지 아보이티스 이사회에 있었다.


발전시장 2위권인 산미겔(San Miguel)과 4위권인 아얄라(Ayala)는 조용하다. 산미겔은 맥주 회사로 알려졌지만 연결매출이 1조 5,000억 페소(약 35조 원), 회사 스스로 공시하듯 필리핀 GDP의 5%에 해당하는 초대형 재벌이다. 아얄라는 1834년에 창업한 필리핀 최고(最古) 재벌로, 마닐라의 금융 중심지 마카티 자체가 이 가문이 세운 도시다. 하지만 둘 다 배전 프랜차이즈가 없다. 산미겔은 발전, 아얄라는 해외 재생에너지가 전력사업의 중심이다.


팡길리난, 아보이티스, 앙, 아얄라. 필리핀 전력시장의 큰손을 따라가면 결국 재벌가의 이름으로 귀결된다. 시민단체 IBON재단은 여덟 가문이 발전·배전 부문 순이익의 95%를 가져가는 것으로 추산한다. 국가 독점을 깨고 경쟁을 도입한 지 25년이 지났지만, 전력시장의 이익은 여전히 소수 가문에 집중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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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를 돕기 위해 AI로 생성한 이미지입니다.


가장 약한 고리


대형 재벌만 이슈 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지방의 121개 전력협동조합이다. 메랄코의 시스템 손실률이 규제상 허용 기준인 6.5% 아래인 반면, 협동조합에는 12%의 기준이 적용되고 실제 손실률이 16%에 이르는 곳도 있다. 민간기업이 경제성을 확보하기 어려운 지방과 농촌의 배전망을 맡고 있지만, 일부는 경영 취약성과 지역 정치의 영향에도 노출돼 있다. 


전력산업은 대형기업이 주도할 수밖에 없는 산업이기도 하다. 발전소와 전력망에는 막대한 투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대형기업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소수 기업이 큰 영향력을 가진 시장에서 소비자의 부담과 새로운 사업자의 진입을 어떻게 함께 다룰 것인가다.


이 구조는 태양광 시장에서도 나타난다. 큰손들도 새로운 먹거리를 찾아 움직이고 있다. 메랄코는 자회사를 통해 단일 부지 기준 세계 최대급인 3500MW 태양광·배터리 단지를 건설하고 있고, 아얄라의 ACEN은 원래 재생에너지 전문기업이다. 산미겔과 아보이티스도 태양광 개발을 확대하고 있다.


그런데 옥상 태양광은 다르다. 대규모 발전소와 달리 가정과 소규모 사업장에 분산된 설비이기 때문이다. ‘내 전기법’과 최근의 규제 완화가 주목하는 지점도 바로 여기다. 전력회사가 독점적으로 공급하던 전기를 소비자가 직접 만들어 쓰는 시장을 넓히는 것이다.


의회의 EPIRA 개정 논의가 2027년까지 이어지는 사이, 전력시장 개혁의 승부처는 국회에서 규제기관으로 옮겨가고 있다. 큰손들이 지배하는 전력시장에서 필리핀은 소비자 부담을 낮추면서도 필요한 투자와 새로운 시장을 함께 키우는 해법을 찾을 수 있을까.

고영경 연세대학교 국제학대학원 연구교수 / 아시아비즈랩 연구소장


[글쓴이 소개

연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지역학 석사를, 고려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재무 전공) 학위를 받았다. 10여 년간 말레이시아 현지 대학 및 연구기관에서 조교수와 선임연구원으로 근무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디지털통상연구센터 연구교수이자 아시아비즈랩 연구소장으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아세안 슈퍼앱 전쟁》, 7UPs in Asia》 등이 있으며, 기업 스토리텔러 및 중앙일보 〈마켓 나우〉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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