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전 설계에 묶인 전력시장…VPP·ESS, 기술 아닌 제도에 가로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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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100GW 보급을 목표로 제시했지만, 전력계통은 이를 받아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발전 설비는 빠르게 늘고 있지만 송전망 확충은 지연되고, 남는 전기는 출력제어로 버려지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기후솔루션은 27일 이슈브리프 ‘변화하는 전력산업, VPP·ESS는 왜 제자리인가‘를 발간하고, 한국 전력시장이 재생에너지 확대에 필요한 배터리와 가상발전소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문제의 본질을 설비 부족이 아닌 시장 설계의 한계로 규정한다. 재생에너지 확대의 병목은 기술이 아니라 제도라는 진단이다.
현재 한국 전력시장은 하루 전 예측에 기반해 운영된다. 실제 발전량과 수요가 달라져도 이를 조정할 실시간 가격 신호가 없어 전력거래소의 행정적 개입에 의존한다. 이 과정에서 비효율이 발생하고 비용은 전기요금으로 전가된다. 감사 결과에 따르면 이러한 운영 비효율로 인한 비용 낭비는 연간 1조 원대에 이른다. 실시간 시장 부재는 단순한 제도 공백이 아니라 계통 유연성 자체를 막는 구조적 문제로 지적된다.
보조서비스 시장 역시 구조적 한계를 드러낸다. 주파수 유지와 예비력 확보를 위한 이 시장은 본래 빠른 응동이 가능한 자원을 보상해야 한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연료비 기준 정산 구조가 적용되면서 연료비가 없는 ESS와 VPP는 경쟁 자체가 불가능하다. 여기에 법적 지위도 불명확해 시장 참여조차 제한된다. 결과적으로 가장 빠르고 정밀한 자원이 아닌 가스발전기가 시장을 점유하는 상황이 지속된다.
재생에너지 입찰시장 도입 역시 근본적 해법이 되지 못하고 있다. 재생에너지만 가격 경쟁에 노출되고 화석연료 발전은 기존 CBP 체계로 보호되는 구조가 유지되기 때문이다. 가격을 낮춰도 낙찰이 보장되지 않는 반면, 화력발전은 일정 수준의 가동이 유지된다. 이는 경쟁이 아닌 부담 전가에 가깝다. 보고서는 이를 ‘반쪽짜리 시장’으로 규정하며, 재생에너지 투자 위축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분석한다.
해외 사례는 다른 방향을 보여준다. 독일은 인트라데이 시장을 통해 실시간 가격 신호를 도입했고, 호주는 IRP 제도와 가격입찰 구조를 통해 ESS와 VPP의 시장 참여를 보장했다. 그 결과 예비력 사용량은 감소했고, 보조서비스 시장에서는 배터리가 주요 공급자로 자리 잡았다. 시장 설계가 바뀌자 자원의 역할도 바뀌었다는 점이 핵심이다.
보고서는 세 가지 정책 전환을 제안한다. 실시간 시장과 보조서비스 시장의 전국 확대 일정 확정, ESS·VPP의 법적 참여 자격 부여와 정산 구조 개편, 그리고 모든 발전원이 동일한 조건에서 경쟁하는 가격입찰제 도입이다. 이는 단순한 제도 개선이 아니라 전력시장 작동 방식의 전환을 의미한다.
메시지는 명확하다. 한국 전력시장은 여전히 화석연료 중심 설계 위에서 작동하고 있으며 그 결과가 지금의 출력제어와 비용 증가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시장은 설계대로 움직인다. 기술이 준비됐음에도 활용되지 못하는 현실은 정책의 지연이 아니라 방향의 문제에 가깝다. 재생에너지 100GW는 숫자로는 가능하다. 다만 지금의 제도 위에서는 그 전기가 흘러갈 자리를 찾지 못할 가능성이 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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