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진의 헤일메리] 우리는 불화(不和)하되 결국 살아남을 것이다
본문
영화 <버티컬 리미트>가 보여 준 인간의 오만한 빙하 정복욕
네팔 대홍수 사태가 보여 주는 기후 불평등의 계급주의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등 기후 위기 환경 다큐 잇따라 선보여
우리에게 빙하나 빙벽은 정복의 대상이었지 보존해야 할 대상이 아니었다. 할리우드의 숱한 산악 영화들이 그 같은 오만을 보여 준다. 2000년에 나온 <버티컬 리미트, Vertical Limit>가 대표적이다. 007 같은 첩보 영화를 주로 만들었던 마틴 캠벨 감독 작품으로 크리스 오도넬과 로빈 터니가 나왔다. 빌런 역으로 나왔던 빌 팩스턴은 어느새 고인이 됐다. 영화는 험난하기로 최고봉 소리를 듣는 히말라야의 K2(해발 고도 8,611m) 등정 이야기다. 제목 '버티컬 리미트'는 수직 한계라는 뜻으로, 산악 등반에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극한의 높이, 즉 생과 사를 가르는 데드존을 말한다. 영화 <버티컬 리미트>에서 오빠 피터(크리스 오도넬)는 크레바스(빙하 계곡에 형성된 깊은 균열)에 빠진 여동생 애니(로빈 터니)를 살려내기 위해 구조대를 조직하지만 만만치가 않다. 영화는 그렇고 그런 재난 극복 가족드라마이다. 26년 전 <버티컬 리미트>를 볼 때, 그 견고하면서도 거대한 빙하가 녹아내리거나 빙벽이 무너지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단 한 사람도!

사진 출처 : Daum 영화
그러나 무너졌다. 네팔 대홍수 사태는 실로 충격적이다. 하늘에서 물폭탄이 쏟아진 것이 아니다. K2 같은 고산지대의 무시무시한 빙벽들과 영구적이라 믿었던 동토층이 녹아내리며 수백만 톤의 암반과 섞여 그것이 만들어 낸 산사태가 대홍수로 이어진 것이다. 사람들은 자연이 분노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사회과학의 관점으로는 기후 위기의 계급성이 노골적으로 구현된 것으로 분석된다. 기후 위기는 화석연료를 원 없이 펑펑 쓰며 지구 온난화를 일으킨 주범 국가, 곧 선진 자본주의 국가라는 기후 제국주의자들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그런데 탄소 배출량이 전 세계 0.05%에 불과하며 수력과 태양광 사용 등 자연보호에 힘을 기울였던 네팔 같은 나라가 오히려 막대한 피해를 본다. 따라서 지금의 기후 문제는 기후 남북문제, 기후 불평등 구조에 대한 인식이 중요하다. 기후협약에 모인 유럽 국가들의 상생 노력, 보상과 개발기금 지원이 더욱 세심해져야 하는 이유이다. 그럼에도 미국 트럼프는 파리기후협약에서 탈퇴한 지 오래이며 여전히 기후 위기를 대사기극이라 부른다. <버티컬 리미트>의 악당이자 부유한 사업가인 엘리엇(빌 팩스턴)의 오만방자한 모습 그대로이다. 엘리엇은 결국 위기 속에 혼자만 살려고 발버둥 치다 최후를 맞는다. 어찌 보면 26년 된 산악 영화가 트럼프의 마지막을 예고하고 있는 셈이다.
고산지대의 빙벽, 만년설이라 불렸던 눈이 폭풍이 되어 벌어지는 참극을 다룬 영화로는 2015년에 나왔던 <에베레스트>도 있다. 이 영화를 이번 네팔사태로 복기해 보면 기후 위기의 계급 문제가 제1 원인이지만 또 다른 제2, 제3의 문제도 복병처럼 숨어 있음을 알게 된다. 바로 무분별한 개발이다. 대체로 관광 목적으로 히말라야의 고산지대를 훼손하고 있는 것도 이번과 같은 사태를 만들어 내는 요인 중 하나가 된다는 걸 알게 된다. 영화는 해발 8,848m의 에베레스트가 더 이상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준다. 주인공들은 상업 등반 가이드들이다. 로브 홀(제이슨 클라크)과 스콧 피셔(제이크 질렌할)는 순전히 돈을 벌기 위해 에베레스트에 오른다. 새로운 코스를 짜고 새롭게 길을 내려고 한다. 영화는 결국 인간의 정복 욕구 자체가 모든 문제의 시원이라는 얘기를 건넨다. 눈사태와 눈폭풍은 어쩌면 인간 스스로가 자초한 것일 수 있다. 지금 와서 다시 보면 다른 관점으로 보게 되는 영화이다. 저 에베레스트의 빙벽들은 과연 안전할까. 이제 한두 명의 등반가들 목숨만이 위태로운 게 아니다. 자칫 인류 절멸의 위기감을 고조시킨다. 이제 <버티컬 리미트>가 됐든 <에베레스트>가 됐든 마음 놓고 즐길 수 있는 산악 어드벤처 영화는 없게 된 셈이다.
영화제 중에는 산악영화제라는 것도 있다. 세계적으로는 매년 11월에 열리는 밴프산악영화제(Banff Centre Mountain Film & Book Festival)가 규모가 가장 크고 이탈리아의 트렌토 영화제 그리고 한국의 울산울주세계산악영화제가 있다. 밴프영화제는 애초에 캐나다 앨버타주 밴프 국립공원을 세계적으로 알릴 요량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밴프는 북미 대륙을 남북으로 가르는 로키산맥의 핵심 지역이다. 로키에서 뻗어 나온 여러 줄기 산맥들이 즐비하며 세계 산악인들의 등반 로망이 몰리는 곳이다. 특히 송곳 같은 봉우리 10개가 나란히 있는 ‘텐 픽스 계곡’으로 잘 알려진 곳이다. 영화제는 이들 산악을 탐험하는 등반가들의 이야기와 작품들로 채워져 왔다. 그러나 몇 해 전부터 기후 위기로 인한 빙하 소멸의 문제와 산악 생태계가 훼손되는 문제를 다루는 환경 다큐멘터리가 집중적으로 소개되고 있다.
이 같은 주제 의식은 오는 9월 18일부터 22일까지 열리는 울산울주세계산악영화제(UMFF)도 마찬가지이다. 산악인 엄홍길이 집행위원장인 이 영화제는 산악’영화’보다 ‘산악’영화로 그 비중이 옮겨 갔다가 최근 들어서는 ‘산악환경영화’를 중시하고 있다. 올해가 11번째인 이 영화제는 <제이슨의 나무상자> <프로스트 이야기> 등을 선보인다. <프로스트 이야기>는 북극곰 프로스트 이야기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빠르게 온난화가 진행되는 곳, 노르웨이 스발바르가 배경이다. 새끼들을 키우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어미 곰의 생존과 사랑, 갈등과 상실의 이야기를 다룬다. 한 다큐멘터리스트가 10년을 공들인 작품이다. 이들 영화제의 작품들은 환경과 기후에 대한 자각을 더 깊게 불러일으킬 것이다. 사람들에게 영화와 영화제가 필요한 이유다. 영화제가 단순한 소모성 행사가 아니라 기후 위기에 대한 정치적 행동, 경제적 대책을 마련하게 하는 단초임을 보여 준다. 기후 문제 영화들을 다루는 영화제를 축소하거나 폐지하려는 것은 마치 트럼프가 파리기후협약에서 탈퇴하는 악행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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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스트 이야기' 스틸 컷. 사진 출처 : 울산울주세계산악영화제
9월 10일 열리는 제18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도 ‘에코 다큐멘터리: 함께 불화하기’ 섹션에서 다양한 영화들을 상영한다. 국제경쟁 섹션의 <골칫덩어리 곰>은 특히 빙하 문제를 다루는 작품이다. 캐나다 매니토바주 처칠 마을(캐나다에서 가장 춥다. 영하 27도가 기본이다)은 세계 북극곰의 수도라 불리는 곳이다. 그러나 기후변화로 빙하가 녹자 이동 경로를 잃은 곰들이 먹이를 찾아 마을로 내려와 쓰레기통을 뒤지는 등 ‘말썽’을 부린다. <골칫덩어리 곰>은 인간이 환경에 저질러 놓은 짓을 반성하지 않고 오히려 이들 곰을 골칫덩어리로 여기는 행태를 고발하는 내용이다. 제목과 달리 전혀 귀여운 작품이 아니다. 심각하다. 이 다큐를 만든 공동감독 가브리엘라 오시오 반덴, 그리고 잭 와이스먼의 메시지는 명료하다. 불화할지라도, 우리는 (북극곰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 불화할 것을 알지만, (사람과 자연은) 서로를 탐색하고 뒤엉키며 잘 살아야 한다, 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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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칫덩어리 곰' 스틸 컷. 사진 출처 :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북극곰 위기에서 네팔 참사까지 일련의 사태는 다시 한번 태양광 발전을 비롯한 신재생 에너지 개발이 절실한 시대임을 깨닫게 한다. 태양은 빙하도 녹게 하지만 그 빙하를 녹게 하지 않기 위한 에너지를 주기도 한다. 남은 이야기는 간단하다. 태양광에너지를 쓰면 온난화를 막을 수 있다. 그러면 빙하도 지키고 빙하를 지키면 다시 태양이 우리에게 (빙하를 지킬 수 있는) 에너지를 준다. 이것이야말로 에너지의 선순환이다. 오디세우스를 집으로 떠나보내며 님프 칼립소는 이런 식으로 말한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게) 저항하지 말고 믿음을 가지라. 그에게 몸을 맡기라. 그리고 살아남으라.” 이 말을 바꾸면 이렇게 될 것이다. ‘(태양의 신 아폴론에게) 저항하지 말고 그의 말을 들으라. 그가 주는 빛과 열을 겸허히 받아들여서 살아남으라.’ 솔라타임즈의 슬로건은 ‘태양의 수명은 50억 년 남았다’이다. 솔라타임즈가 ‘50억 년 영화제’를 해야 할 판이다. 할 것인가? 해낼 것인가?!
오동진 영화평론가
[글쓴이 소개]
고려대학교 사학과를 나왔다. 연합뉴스, 와이티엔(YTN) 등에서 기자 생활을 했다. 영화 주간지 <필름2.0(FILM2.0)>과 <씨네 버스(cine bus)>, <엔키노(nKINO)> 등에서 영화 전문 기자 및 편집장으로 활동했다. 부산국제영화제 마켓위원장,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집행위원장, 부산 동의대학교 영화과 초빙교수 역임, 현재 들꽃영화상 운영위원장,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 '작은 영화가 좋다', '사랑은 혁명처럼 혁명은 영화처럼', '불온한 영화를 위하여'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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