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전, 삼성·SK에 25조원 전기료 선납 요청…반도체 업계는 거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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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20조·SK하이닉스 5조원 규모…5년치 전기료 미리 내달라 제안
한전 부채 210조원 넘어…전력망 투자 재원 확보 고육책
용인·호남 반도체 클러스터 전력망 확충 앞두고 투자재원 문제 수면 위로
한국전력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총 25조원 규모의 전기요금을 미리 납부해 달라고 제안했지만 두 회사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14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최근 한전으로부터 받은 전기요금 선납 방안을 내부적으로 검토한 뒤 수용하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린 것으로 전해졌다.
한전이 제시한 금액은 삼성전자 20조원, SK하이닉스 5조원이다. 지난해 두 회사가 납부한 전기요금을 기준으로 각각 약 5년치에 해당하는 규모다.

한전은 두 회사가 전기요금을 미리 납부하면 해당 재원을 국가 기간 전력망 확충에 우선 투자한다는 방안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선납금에는 국고채 2년물 금리보다 높은 수준의 이자를 적용하고 이를 반기마다 실제 전기요금에서 차감하는 방식이다.
한전으로서는 일종의 장기 선수금을 확보하는 셈이다. 이를 통해 신규 사채 발행을 줄이면서 당장 필요한 전력망 투자재원을 확보할 수 있다.
그러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5년치 전기요금을 한꺼번에 지급하는 것은 부담이 지나치게 크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반도체 업황이 지난해 하반기 이후 호조를 이어가고 있지만 현재의 호황이 향후 5년 동안 계속된다고 장담하기 어렵다. 업황 변동성이 큰 반도체 산업의 특성상 수조원에서 수십조원에 이르는 현금을 장기간 묶어두는 것도 기업의 중장기 투자와 재무전략에 부담이다.
이번 제안은 단순히 한전과 두 반도체 기업 사이의 전기요금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향후 국내 산업 경쟁력을 좌우할 대규모 전력망 건설 비용을 누가, 어떤 방식으로 부담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그대로 드러냈기 때문이다.
특히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를 비롯한 대규모 산업단지는 막대한 신규 전력수요를 발생시킨다. 발전설비를 늘리는 것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생산된 전기를 실제 수요처까지 보내기 위한 송전선로와 변전소 등 계통 인프라가 함께 구축돼야 한다.
문제는 투자 여력이다.
한전의 재무상황은 여전히 무겁다. 지난 6월 말 기준 총부채는 210조7천억원에 달한다. 하루 이자 부담만 약 115억원 수준이다.
사채 발행을 통한 자금 조달에도 한계가 있다. 한전의 사채 발행 한도를 자본금과 적립금 합계의 최대 5배까지 확대해 준 정부 특례도 내년 말 종료될 예정이다.
결국 한전은 천문학적인 부채를 안은 상태에서 노후 전력망을 보강하는 동시에 반도체와 데이터센터, 재생에너지 확대에 필요한 신규 전력망까지 건설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이번 25조원 선납 제안이 눈길을 끄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통상 전기요금은 전기를 사용한 뒤 납부한다. 그런데 국가 전력망을 책임지는 공기업이 국내 최대 전력 소비기업들에 향후 5년간 사용할 전기요금을 미리 내달라고 요청했다. 그것도 총 25조원에 이르는 규모다.
전력망 투자재원 문제가 더 이상 한전 내부의 재무문제가 아니라 국가 에너지정책의 핵심 문제로 올라왔다는 신호로 볼 수 있다.
앞으로 문제는 더 커질 가능성이 높다.
반도체와 인공지능 데이터센터 등 첨단산업의 전력수요는 증가하고 있고 재생에너지 확대 역시 대규모 송배전망 투자를 필요로 한다. 서남권에서 생산되는 태양광과 해상풍력 전력을 수도권과 산업단지로 보내기 위해서도 계통 확충은 피할 수 없다.
발전소만 짓고 전력망을 제때 건설하지 못하면 전기는 있어도 사용할 수 없다. 반대로 산업단지를 조성하고도 필요한 전력을 공급하지 못하면 첨단산업 육성 계획 자체가 흔들린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25조원 선납 요청을 거절한 것은 기업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선택이다. 오히려 주목해야 할 대목은 한전이 왜 이런 제안을 해야 했느냐다.
210조원이 넘는 부채를 안고 있는 한전에 국가 전력망 확충이라는 막대한 투자를 계속 떠맡기는 현재 구조가 지속 가능한지 이제는 따져봐야 한다.
전력망은 반도체 기업만 사용하는 시설도, 한전만의 자산도 아니다. 재생에너지 확대와 첨단산업 육성, 지역 간 전력수급을 연결하는 국가 기간 인프라다.
25조원의 전기요금 선납 제안과 그 거절은 결국 하나의 질문을 남긴다.
에너지 대전환에 필요한 전력망은 누가, 어떤 돈으로 건설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반도체 클러스터도, 재생에너지 확대도 결국 계통이라는 같은 벽 앞에서 멈출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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