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일루의 시선] 호르무즈 쇼크가 드러낸 보수 언론의 에너지 안보 착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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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무즈 해협은 한국 경제의 급소다.
유조선 한 척이 멈추면 환율이 흔들리고 물가가 움직인다. 중동발 위기는 언제나 한국 산업의 구조적 불안을 드러냈다. 이번 호르무즈 쇼크 역시 마찬가지다. 공급망은 흔들렸고 국제 유가는 급등했다. 한국 경제는 다시 한번 수입 에너지 의존 국가의 현실을 확인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위기는 미래에서 왔는데 한국 사회 일부가 내놓는 해법은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다. 더 많은 해외 유전 확보. 더 많은 원전 건설. 더 강한 중앙 통제. 익숙한 이야기다. 하지만 에너지 안보의 시대는 이미 바뀌고 있다.
해외 자원개발 확대론부터 그렇다. 해외 유전에 지분이 있다고 해서 위기 상황에서 원유가 자동으로 한국으로 들어오는 시대는 끝났다. 전쟁이 터지면 해협이 막히고 보험료가 폭등한다. 지정학적 충돌이 시작되면 계약서보다 군함과 외교가 먼저 움직인다. 자주 개발률 숫자만으로 에너지 안보를 설명하기 어려운 이유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방향이다. 2020년대 에너지 안보의 핵심은 더 많은 석유를 확보하는 것이 아니다. 석유 자체를 덜 쓰는 구조로 이동하는 일이다. 산업의 전기화와 분산형 전원 확대, 저장장치와 송배전망 강화가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과거처럼 더 많은 원유를 확보하는 방식만으로는 공급망 위기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원전 중심론 역시 마찬가지다. 원전은 안정적이다. 그러나 유연하지 않다. 지금 전력망의 핵심은 단순한 기저발전 확대가 아니다. 빠르게 변하는 수요를 얼마나 안정적으로 흡수하고 조정할 수 있느냐다. 태양광과 풍력 비중이 높아질수록 중요한 것은 거대한 발전소 한 기가 아니라 ESS와 송배전망, 실시간 계통 운영 능력이다.
원전 경제성 역시 과거와 같은 조건 위에서 유지되기 어렵다. 원전은 높은 이용률과 장기 연속 운전을 전제로 가장 효율적인 구조를 만든다. 하지만 재생에너지 비중이 확대될수록 출력 조정과 유연 운전 요구는 커질 수밖에 없다. 원전 확대만으로 미래 전력망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단순 논리가 점점 현실과 충돌하는 이유다.
재생에너지의 중국 의존 문제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 문제는 재생에너지를 포기해야 할 이유가 아니라 산업정책 부재를 보여주는 사례에 가깝다. 태양광은 최소한 선택지가 있다. 셀과 모듈, 인버터와 ESS는 정책 지원과 공급망 다변화를 통해 국산화가 가능하다. 실제로 미국과 유럽은 보조금과 세액공제를 통해 자국 생산기반을 다시 키우고 있다.
반면 원유와 LNG는 다르다. 한국은 산유국이 아니다. 아무리 돈을 써도 중동 의존 자체를 없앨 수는 없다. 중국산 태양광 의존을 걱정하면서 중동산 원유 의존은 현실이라 말하는 순간 논리는 흔들린다. 안보는 익숙한 의존이라고 해서 안전해지지 않는다.
호르무즈 쇼크가 보여준 것은 재생에너지의 한계만이 아니다. 오히려 한국 경제 전체가 여전히 수입 연료 중심 구조에 묶여 있다는 사실이다. 진짜 에너지 안보는 더 먼 곳의 유전을 사들이는 일이 아니다. 수입 연료 없이도 버틸 수 있는 산업 구조를 만드는 일이다.
에너지 안보의 기준은 달라지고 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생산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덜 흔들리느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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