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일루의 시선] 송전선만이 답은 아니다…수력발전이 여는 재생에너지 계통 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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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 ‘25GW 하이브리드 발전’이 한국 전력정책에 던지는 과제
재생에너지 확대의 최대 걸림돌은 발전설비가 아니라 계통이라는 지적이 다시 제기됐다. 국제 에너지 싱크탱크 Ember는 최근 발표한 보고서에서 유럽 주요 국가들이 기존 수력발전소의 계통 접속설비를 풍력·태양광과 공동 활용할 경우, 신규 송전망 건설 없이도 최대 25GW 규모의 재생에너지를 추가로 계통에 연결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는 오스트리아·프랑스·스페인 등 7개국이 2030년까지 계획한 신규 풍력·태양광 설비의 약 18%에 해당하는 규모다.
보고서가 주목한 것은 발전원이 아니라 계통이다. 지금까지 재생에너지 확대 정책은 태양광과 풍력 설비를 얼마나 더 설치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춰 왔다. 그러나 실제 현장에서는 발전소보다 송전선과 변전소 부족이 더 큰 제약으로 작용하고 있다. 발전사업 허가를 받고도 계통 접속이 수년씩 지연되는 사례가 속출하고, 출력제어 역시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Ember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이브리드 발전(Hybridisation)’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기존 수력발전소가 보유한 계통 접속 용량을 태양광이나 풍력과 함께 사용하는 방식이다. 수력발전은 하루 종일 최대 출력으로 운전하지 않기 때문에 상당한 계통 용량이 유휴 상태로 남아 있다. 이 여유 용량을 재생에너지 발전원이 공유하면 별도의 송전망 증설 없이도 계통 활용도를 크게 높일 수 있다는 설명이다.
운영 방식도 비교적 단순하다. 낮에는 태양광 발전량이 증가하면 수력발전은 출력을 줄여 저수지에 물을 저장한다. 반대로 야간이나 흐린 날에는 저장한 물을 이용해 수력발전 출력을 높인다. 풍력 역시 동일한 방식으로 연계할 수 있다. 수력발전이 사실상 대규모 에너지저장장치(ESS) 역할을 수행하는 구조다.
보고서는 기술보다 제도가 더 큰 걸림돌이라고 진단했다. 조사 대상 국가 가운데 하이브리드 발전을 제도적으로 허용한 국가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정도에 불과하다. 나머지 국가는 계통 접속과 시장 운영 규정이 발전원별로 분리돼 있어 동일한 접속점을 공동 이용하기 어렵다. 이에 따라 Ember는 계통 접속 제도 개선과 케이블 풀링(Cable Pooling), 오버플랜팅(Overplanting) 허용 등을 주요 정책 과제로 제시했다.
이 같은 분석은 국내 전력시장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우리나라는 호남권을 중심으로 계통 포화가 심화되고 있으며, 한국전력의 계통 접속 대기 물량도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태양광 발전사업 허가를 받아도 접속 가능 시점을 기약하기 어려운 사례가 이어지고 있고, 제주를 넘어 육지에서도 출력제어가 일상화되는 추세다. 송전망 확충이 지연될수록 이러한 현상은 더욱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
반면 국내에는 하이브리드 발전을 적용할 수 있는 기반이 이미 상당 부분 마련돼 있다. 소양강댐과 충주댐, 안동댐 등 대형 수력발전소는 물론 양양·청평·예천·산청 등 양수발전소는 수백MW에서 GW급 계통 접속설비를 갖추고 있다. 이들 발전소는 국가 전력망의 핵심 거점으로 기능하고 있으며, 대부분 높은 송전 용량을 확보하고 있다.
부유식 태양광과의 연계 가능성도 충분하다. 국내에서는 합천댐과 임하댐 등에서 부유식 태양광 운영 경험을 축적해 왔다. 저수지 수면을 활용한 태양광과 기존 수력발전소를 하나의 계통으로 통합 운영한다면 송전망 신설 부담을 줄이면서 재생에너지 공급을 확대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다. 특히 양수발전과 결합할 경우 출력 변동성까지 완화할 수 있어 계통 운영 측면에서도 장점이 크다.
물론 현실적인 과제도 적지 않다. 현재 국내 전력시장 제도는 발전원별 계통 접속 계약을 전제로 설계돼 있다. SMP 정산과 REC 발급 역시 개별 발전소 단위로 이뤄진다. 동일한 계통 접속점을 여러 발전원이 공동 사용하는 개념은 제도적으로 반영돼 있지 않다. 발전사업 허가부터 계통 운영, 전력시장 정산까지 전반적인 제도 개선이 필요한 이유다.
그렇다고 불가능한 과제는 아니다. 우리나라는 이미 유연접속 제도 도입과 분산에너지 활성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RE100 산업단지 조성과 계통 운영 효율화 역시 정부의 주요 정책 방향이다. 하이브리드 발전은 이러한 정책들과도 충분히 접목될 수 있다. 특히 계통 확보가 어려운 지역에서 기존 발전 인프라를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은 사업성과 정책 효과를 동시에 높일 수 있는 방안으로 평가된다.
재생에너지 확대와 송전망 확충은 앞으로도 병행돼야 한다. 그러나 송전선 건설만으로 계통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주민 수용성과 환경영향, 인허가 절차 등 넘어야 할 장벽이 너무 많다. 새로운 송전망을 기다리는 동안 기존 계통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활용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
유럽의 사례가 보여주는 핵심은 단순하다. 계통 부족 시대에는 발전소를 더 많이 짓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미 구축된 계통 인프라를 여러 발전원이 함께 사용하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이제 우리 전력정책도 ‘얼마나 더 건설할 것인가’를 넘어 ‘어떻게 더 효율적으로 활용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해야 할 시점이다. 송전망은 늘려야 하지만, 그보다 먼저 기존 계통을 최대한 활용하는 지혜가 요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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