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일루의 시선] 장기계약은 이미 있었다… 정부의 RPS 개편 홍보가 외면한 시장의 현실
본문
정부가 15년간 운영해 온 신재생에너지 공급의무화제도(RPS)를 폐지하고 새로운 계약시장 도입을 추진하면서 대대적인 홍보에 나서고 있다. 한국에너지공단은 대중적 영향력이 큰 유튜브 경제 채널에 전문가와 정부 관계자를 출연시키고 콘텐츠 제작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제도 개편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있다. 국민의 세금이 투입된 정책 홍보지만 정작 기존 제도의 문제점과 민간 발전사업자들의 우려는 충분히 다뤄지지 않고 있다.
정부는 기존 RPS 체제에서 전력도매가격(SMP)과 신재생에너지공급인증서(REC) 가격의 변동성이 발전사업자의 수익 불확실성과 금융비용 부담을 키웠다고 설명한다. 새로운 계약시장은 정부가 발전원별 보급 물량을 제시하고 경쟁입찰을 통해 사업자를 선정한 뒤 20년간 고정가격을 보장함으로써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요한 사실이 빠져 있다. 기존 RPS 체제에서도 이미 20년 장기 고정가격계약제도가 운영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정부가 새로운 제도의 장점으로 강조하는 장기계약은 결코 새로운 정책 수단이 아니다.
그렇다면 정부가 먼저 답해야 할 질문은 명확하다. 기존에도 장기계약이 가능했는데 왜 발전사업자들은 입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는가. 실제로 고정가격계약 경쟁입찰은 여러 차례 모집 물량을 채우지 못했다. 그 배경에는 정부가 제시한 가격으로 충분한 사업성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사업자들의 판단이 있었다. 장기계약을 체결하더라도 발전소 건설비와 금융비용을 감당하고 적정 수익을 확보할 수 없다면 입찰에 참여할 이유가 없다. 기존 제도의 문제를 계약기간의 불확실성으로만 설명하는 것은 시장의 현실을 지나치게 단순화한 해석이다.
금융비용 절감이라는 주장 역시 마찬가지다. 안정적인 현금흐름이 금융조달에 유리한 것은 사실이지만 금융기관이 평가하는 것은 계약기간만이 아니다. 예상 매출과 운영비용, 원리금 상환 능력과 투자수익률 등이 종합적으로 고려된다. 아무리 20년간 가격을 보장하더라도 그 가격으로 충분한 수익을 확보하기 어렵다면 금융비용 절감 효과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장기계약은 수익의 예측 가능성을 높일 수 있지만 수익성 자체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재생에너지 발전단가를 낮추려는 정부의 정책 목표 자체를 부정할 이유는 없다. 기술 발전과 규모의 경제를 통해 발전비용을 절감하는 것은 필요한 과제다. 그러나 정부가 원하는 가격과 시장에서 실제로 발전소를 건설할 수 있는 가격은 다르다. 입찰 상한가격을 낮춘다고 해서 설비 구매비와 토지비, 계통연계 비용, 금융비용까지 함께 낮아지는 것은 아니다. 발전단가를 낮추는 정책과 발전사업자에게 낮은 가격을 요구하는 정책은 엄연히 구분돼야 한다.
새로운 계약시장의 본질은 장기계약 도입보다 정부의 시장 개입 확대에 있다. 정부가 보급 물량을 결정하고 경쟁입찰을 통해 계약가격을 형성하는 역할을 강화하는 것이다. 국가 차원에서 재생에너지 보급을 체계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는 장점은 있지만 정부의 가격 결정이 시장에 미치는 영향도 그만큼 커진다. 문제는 이러한 변화에 비해 민간 발전사업자의 투자 여건을 개선하기 위한 대책이 충분하지 않다는 점이다.
국내 태양광 산업은 수많은 민간 사업자의 투자로 성장해 왔다. 이들은 인허가와 계통접속 지연, 금융비용 상승, 출력제어에 따른 손실 등 다양한 위험을 감수하며 발전소를 건설하고 운영해 왔다. 그러나 새로운 제도에서는 정부가 제시하는 물량과 가격에 맞춰 경쟁해야 한다. 사업성을 고려하지 않은 가격 경쟁이 지속된다면 민간투자가 위축될 가능성이 크다. 정부가 아무리 높은 보급 목표를 제시하더라도 실제 투자에 나설 사업자가 없다면 목표 달성은 어렵다.
소규모 발전사업자 보호 대책도 실효성을 따져봐야 한다. 정부는 별도의 입찰 트랙을 마련하겠다고 설명하지만 이것만으로 소규모 사업자의 경쟁력이 확보되지는 않는다. 대규모 사업자와 비교해 설비 구매와 시공, 금융조달 과정에서 불리한 조건에 놓인 소규모 사업자들에게는 비용 차이를 반영한 입찰제도와 실질적인 금융지원이 필요하다. 가격 경쟁만 강조한다면 시장이 일부 대형 자본 중심으로 재편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더욱 주목할 부분은 정부의 홍보 방식이다. 정부 관계기관이 영향력 있는 민간 유튜브 채널을 활용해 정책을 설명하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국민의 세금으로 제작을 지원하는 콘텐츠라면 제도의 장점뿐 아니라 예상되는 부작용과 시장의 반론도 충실히 다뤄야 한다. 특히 발전사업자의 수익성과 투자 여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정책을 설명하면서 기존 입찰 미달의 원인과 새로운 제도의 위험을 충분히 논의하지 않는다면 홍보의 객관성과 균형성에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정부가 진정으로 재생에너지 발전단가를 낮추고 싶다면 먼저 발전비용을 줄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금융비용 부담을 완화하고 계통접속 지연을 해소하며 출력제어에 따른 손실을 줄이는 정책이 병행돼야 한다. 에너지저장장치(ESS)에 대한 투자 유인을 강화하는 등 사업자의 비용 부담을 실질적으로 낮출 방안도 필요하다. 이러한 노력 없이 계약가격 인하에만 집중한다면 새로운 계약시장 역시 기존 고정가격계약 경쟁입찰의 문제를 반복할 수 있다.
정부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새로운 제도의 우수성을 반복해서 홍보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제도가 왜 기대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는지 냉정하게 평가하는 것이다. 장기계약이 없어서 문제가 발생한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했던 장기계약에 사업자들이 충분히 참여하지 않았던 이유부터 살펴야 한다. 그 원인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제도의 이름과 운영 방식을 바꾸는 것만으로 시장의 반응이 달라지기를 기대하기 어렵다.
에너지 전환은 정부의 계획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정부가 보급 목표를 수립하더라도 실제 발전소를 건설하고 운영하는 것은 민간 사업자들이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시장에 더 낮은 가격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이 더 낮은 비용으로 발전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것이다. 새로운 계약시장의 성패는 정부가 얼마나 정교하게 가격과 물량을 통제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업자가 그 시장에서 지속 가능한 투자 기회를 발견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댓글목록0